글

대한제국 시대 견훤에 대한 인식_역적

대한제국 시대 견훤에 대한 인식_역적 //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5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김석근 등이 신주 문제를 아뢰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정2품 김석근(金晳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역적 견훤(甄萱)의 난리 때 고창(古昌)의 성주(城主)로서, 고을 사람인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고을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도와 역적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원수를 갚기를 장사도(張司徒)가 한(漢) 나라를 도와 원수를 갚은 것처럼 하니, 고려의 왕업이 이로 인하여 이룩되었고 그 일대가 보존되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는 공로를 논하여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김선평은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과 장길은 다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작위는 태사(太師)라고 하였으며, 고창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죽자, 안동부의 백성들이 그들의 공덕을 생각해서 사당을 세우고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당 제도는 〖신주를〗 한 줄로 남쪽을 향해 배열하였는데, 김 태사의 신주를 동쪽에, 그 다음이 권 태사, 그 다음에 장 태사의 신주를 놓았습니다. 당시 동쪽을 상석(上席)으로 삼았으면 김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되고 서쪽을 상석으로 삼았으면 장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史官)의 기록이나 여러 책들의 기록에 의하면 장 태사의 명위(名位)가 제일 아래에 있는 만큼, 서쪽에 놓았다고 해서 미루어 상석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니 김 태사를 마땅히 제일 높은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애당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그 증수기(增修記)를 지어 말하기를, ‘안동부에서는 고려 왕조의 공신 3명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김공 선평, 권공 행, 장공 길이다.’라고 하여 그 명위의 차례를 순전히 역사 기록만을 따르고 믿었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

'왜적이 된 조선인들'_사료집

이미지
'왜적이 된 조선인들'_사료집 ​"가는 곳마다 통행 증서를 조선인들에게 배포해 민심을 잡고있습니다. 조선의 영주들은 백성들을 학대해왔으므로 그들에게 인정과 관대함을 베풀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탄금대 전투 직전 히데요시에게 보낸 편지 ​ 상이 하문하기를,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4일 계해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삼가 생각하건대, 어가(御駕)가 궁궐을 떠나던 날 신은 순릉 향사(順陵香使)로서 대궐문까지 달려갔다가 우연히 본 일입니다. 모여 있던 장수들의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016) 라고 하였고, 싸우러 가던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017)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4일 계유 3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상이 이르기를, "시장 백성들이 다 적에게 부역한다는데……."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어찌 색다른 무리들과 더불어 상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잠상인(潛商人)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아무리 멀리 가신다고 해도 적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서 방비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두수로 하여금 편의대로 종사(從事)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8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사법-탄핵(彈劾)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3일 임술 1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12일 을미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왜적이 버리고 간 포로들을...

정도전이 난을 일으키려하자 이성계가 이방원을 시켜 주살하게하다.

정도전이 난을 일으키려하자 이성계가 이방원을 시켜 주살하게하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의 건국(建國)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戶)를 내려 주고, 그 후에 여러 왕자들과 공신(功臣)으로써 각도(各道)의 절제사(節制使)로 삼아 시위(侍衛)하는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加別赤)를 방번에게 사양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서자(庶子)를 꼭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심효생은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여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만들게 하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芳蕃)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謀議)하여 자기편 당(黨)을 많이 만들고는, 장차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황자(皇子)들을 왕으로 봉한 예(例)에 의거하여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도전 등이 또 산기 상시(散...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고려 침략"

이미지
 일본 기록 고콘초몬주의 충격적 기록.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고려를 정벌하다 정도전의 군제 개혁 상소에서 뜻하지않게 나타난 역사의 비밀...,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

정도전의 군제 개혁 상소에서 뜻하지않게 나타난 역사의 비밀.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고려 정벌"

이미지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028) 의 환시(宦侍)·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이미지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028) 의 환시(宦侍)·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

풍수지리 개무시하며 한국사 역대 도읍지를 논하는 정도전

이미지
 풍수지리 개무시하며 한국사 역대 도읍지를 논하는 정도전 //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2일 기묘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였다.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스러운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 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