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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에게 뒤진거같은 도요토미 히데카츠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11일 丁卯 6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비변사가 중국군 장수와 주고 받은 왜적의 정세 및 조선의 형세에 대한 문답국역원문.원본 보기 중국에서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고 왜의 정세와 우리 나라의 형세를 조목으로 물었다. 비변사가 조목에 따라 진술하였는데, 그 문답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 문:왜노의 분명한 수효는 얼마이며, 어떤 정세이고, 어디에 잠복하고 있는가? 답:왜선(倭船)이 처음 부산(釜山)에 도착한 것은 4백여 척이었으며, 또 뒤따라 도착한 것이 7∼8백 척이다. 그들의 개미처럼 흩어지고 멧돼지처럼 내달아 7도(道)를 나누어 점거하고 있다. 1. 문:왜선은 얼마나 되며, 현재 어느 하구(河口)에 정박하고 있는가? 평양에는 현재 얼마나 있으며 얼마나 파괴되었는가? 답:왜선은 길을 나누어 전라도를 침범했는데 본도의 수사(水使) 이순신(李舜臣) 등이 전후 일곱 차례 싸워서 4백여 척을 불태워 격파하였고, 목을 벤 자 이외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이다. 현재 해항(海港)에 정박하고 있는 것은 4∼5백 척이며, 우리 나라의 어선을 약탈한 평양에 남아 있는 적선은 겨우 수십 척이다. 왜인들의 수비가 매우 엄하여 우리 군사가 밤을 타 몰래 가서 몇 척을 파괴했다. 1. 문:팔도의 인심은 어떠하며, 구주(舊主)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의사(義士)들이 호응하여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는가? 답:본국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임금과 백성들이 오랫동안 황제의 은혜를 입어 사람들이 전쟁을 모르고 지낸 지 2백여 년이 되었다. 갑자기 적의 화란을 만나 군정(軍情)이 놀라 흩어져 풍문만 듣고서 붕궤되었다. 근일에는 각도의 의사들이 서로 모여 군대를 이루어 민가에는 남아 있는 장정(壯丁)이 없다. 선비들이 분발하여 적을 죽이기로 뜻을 품어 모두 적과 싸우다 죽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 1. 문:왕경(王京)의 왜노는 얼마나 되며, 평양의 왜노는 처음 얼마였으며 지금 얼마나 더 늘었는가? 답:경성에 남아 있는...

노량해전 전후 각 왜성들과 명나라의 대치 상황

 선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21일 임신 3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네 제독이 각 아문에 보낸 첩문국역원문.원본 보기 네 제독이 각 아문에 첩문을 당보(塘報)하였다. 진 도독(陳都督)이 【진인(陳璘). 】 아문에 당보(塘報)한 첩문은 다음과 같다. "본부가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노량(露梁)에 당도하여 이순신(李舜臣)이 포위당한 것을 보고 본부가 직접 병정을 거느리고 수백 명의 적을 쳐죽이자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승세를 몰아 20여 리를 추격하니 적들이 불에 타 죽고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다 건져내지는 못했지만 생포하거나 참살한 수가 도합 3백 20명이나 되었다. 천총 진구경(陳九經)이 【진인(陳璘)의 아들이다. 】 왜장 1명을 생포했는데 석만자(石曼子)라고 하였다. 부총병 등자룡(鄧子龍)과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유 총병(劉總兵)이 【유정(劉綎). 】 아문에 보고한 첩문은 다음과 같다. "본부가 4로의 관병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곧바로 소서행장의 성 밑에 이르러 삼면에서 공격하기를 인시(寅時)까지 하였다. 풀에 흙을 싸서 해자를 메우고 올라가 안팎에서 협공하자, 왜노들은 우리 군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이 여겼다. 그러나 끝없이 저항하여 해변까지 밀고 갔는데 선박이 없어 추격하지 못하였다. 1백 60명의 수급을 베었고 의복과 갑옷 등의 물품도 노획하였다." 동 제독(董提督)이 【일원(一元). 】 아문에 보고한 첩문은 다음과 같다. "심안도(沈安道)가 새로 세운 채책은 갑자기 공격하여 격파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채책 안에 석만자(石曼子) 밑에서 일을 하는 곽국안(郭國安)이란 자가 성심으로 우리에게 내응해 주었다. 경리 도원(經理都院) 만야(萬爺)가 보낸 유문(諭文)을 받고 본영의 참모관 사세용(史世用)으로 하여금 그 글을 가지고 석만자에게 가서 효유하자, 석만자는 즉시 소서행장(小西行長)·풍신정성(豊臣正成)·충장(忠長)·현소(玄蘇)·조신(調信) 등을 불러 말하기를 ‘새...

노량해전 때 경상남도 사람들이 친왜 부역한 것에 대한 사료

노량해전 때 경상남도 사람들이 친왜 부역한 것에 대한 사료  ============ 선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22일 계유 1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경상우도 수사 이순신이 적에 빌붙은 인민들을 효수하였음을 아뢰다국역원문.원본 보기 경상우도 수사 이순신(李純信)이 아뢰었다. "남해(南海) 인민들이 적에게 빌붙어 서로 통하면서 향도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도장(都將)이라 칭하는 정육동(鄭育同)과 권농(勸農)이라 일컫는 정기생(鄭起生)은 소서행장이 회군했을 때 인민들을 거느리고 주육(酒肉)으로 맞이하여 절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승리하고 회군하였다는 말까지 하면서 칭하한 정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에 우선 이들을 효수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극심했던 자들이 필시 많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은 백성들을 불러 모아 안무해야 할 때이므로 진정시키는 일에 힘써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야 할 것입니다. 노량 싸움에서 진 도독(陳都督)이 우리 나라 판옥선(板屋船) 위에서 역전하는 모습을 신이 목격하였지만 풍신정성(豊臣正成)을 생포한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도독이 신을 불러, 자신이 힘껏 싸운 정상과 적추를 생포한 공을 군문에 보고하라고 하기에 신이 부득이 따랐습니다." 【태백산사고본】 67책 10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48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외교-명(明) ○癸酉/慶尙右道水使李純信啓曰: "南海人民, 附賊交通, 以爲嚮導。 其中鄭育同, 稱爲都將, 鄭起生稱爲勸農, 行長回兵之時, 領率人民, 以酒肉迎拜。 至以勝捷回軍, 稱賀之狀, 人無不言之, 故爲先梟示。 此外尤甚者, 必多有之, 而今當召集安撫之日, 務爲鎭定, 使之自安。 露梁之戰, 陳都督乘我國板屋船, 力戰之狀, 臣所目見, 得擒正成之事, 則未得明知。 都督招臣, 以力戰擒酋之功, 使之稟報軍門, 臣不得已從之。" 【태백산사고본】 67책 10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48면 【분류】...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말한 노량해전_조선왕조 선조실록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말한 노량해전_조선왕조 선조실록 // 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7일 정사 1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진 도독의 관사에 거둥하여 접견례를 행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상이 진 도독의 【진인(陳璘). 】 관사에 거둥하여 접견례를 행하였다. 【노량(露梁)의 전투에서 진격해오던 적이 물러가 마침내 전승하였으니 그 성공은 천운이었다. 】 진인이 말하기를, "부산성(釜山城)은 성곽이 불완전하여 적을 막을 수 없으나 만약 20∼30만 냥의 은자(銀子)를 가지고 무기를 보완하고 용사를 모집한다면 적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은 대마도와 가까와 순풍을 만나면 하루에 오갈 수 있어 적이 오는 길목이니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이 나라를 이처럼 깊이 생각하시니 감격스럽습니다." 하고, 상이 윤돈(尹暾)에게 이르기를, "부득이 부산성을 개축한다면 왜적의 옛 보루(堡壘)를 철거하고 쌓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돈이 아뢰기를, "그래야 합니다." 하였다. 도독이 말하기를, "대마도는 토질이 척박하니 반드시 이 나라의 미곡을 필요로 할 것이고 게다가 고기를 잡기 위해 오가다가 평상시에 몰래 노략질할 우려가 없지 않으니 반드시 중국의 제도처럼 돌로 몇 층의 지대(地臺)를 단단하게 쌓고 그 위에 벽돌을 매끈하게 쌓아올려 침입해 오더라도 붙잡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경(王京)은 바로 근본이 되는 지역인데 도성이 지나치게 크고 견고하지 않으니 반드시 군문(軍門)과 강정(講定)하여 개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우리 나라의 근본을 위하시는 걱정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도성이 너무 크다는 것은 과인도 이미 알고 있으나 다만 형세가 이와 같으니 어떻게 개축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대인께서 좋은 방법을 지도해 주십시오....

노량해전 전사자 사료

 노량해전 전사자 사료 //조선왕조 선조실록 선조실록 110권, 선조 32년 3월 7일 병술 1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통판 여민화의 관소에 거둥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상이 통판(通判) 여민화(黎民化)의 관소에 거둥하였다. 【관량 통판(管糧通判)으로 위인이 온화하고 단아하여 다른 장수에 비하여 조금 관대하였다. 】 통판이 말하기를, "전일에 국왕의 변무 주본(辨誣奏本)을 보니 그 뜻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관왕묘(關王廟)의 신에게 울며 고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이번에 적이 물러간 일로 황상께서 매우 기뻐하고 계시는데 정(丁)·서(徐) 두 사람이 계속 사실을 날조하고 있습니다. 눈썹을 깎은 일에 있어서는 서 급사(徐給事)가 자신이 한 일인데 도리어 그 책임을 무대(撫臺)에 돌리려고 하니 이 때문에 형 군문(邢軍門)도 주본을 올려 변명하였으나 황지(皇旨)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서 급사는 이번에 돌아올 것인데 탄핵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요양(遼陽)에 머물러 병을 칭탁하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외번(外藩)으로 중국의 통보를 얻어볼 길이 없소이다. 저번에 상사(上司)를 만나 비로소 성상께서 공로를 포상하고 종묘에 고한 것과 정 주사(丁主事)에 대해서도 관적(官籍)을 회수하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으니, 참으로 만리 앞을 내다보시는 식견이외다. 관왕묘에 방(榜)을 걸었다는 일은 우리 나라로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이까." 하였다. 통판이 말하기를, "왜자(倭子) 10명이 부산의 적진에서 나와 말하기를 ‘진 제독(陳提督)이 노량(露梁)의 전투에서 승첩을 거둘 때 왜노의 죽은 자가 1만 3천 명이고 유 제독이 죽인 것도 1천여 명이었다. 행장과 청정은 이미 본진(本鎭)으로 철수하여 돌아갔으나 평의지(平義智)는 지금 대마도에 있으면서 다시 침범할 계획을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중국군은 왕 지휘(王指揮)가 그들의 군량을 주관하는데 지금 바닥이 났...

대한제국 시대 견훤에 대한 인식_역적

대한제국 시대 견훤에 대한 인식_역적 //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5월 13일 양력 1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김석근 등이 신주 문제를 아뢰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정2품 김석근(金晳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역적 견훤(甄萱)의 난리 때 고창(古昌)의 성주(城主)로서, 고을 사람인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고을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도와 역적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원수를 갚기를 장사도(張司徒)가 한(漢) 나라를 도와 원수를 갚은 것처럼 하니, 고려의 왕업이 이로 인하여 이룩되었고 그 일대가 보존되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는 공로를 논하여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김선평은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과 장길은 다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작위는 태사(太師)라고 하였으며, 고창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죽자, 안동부의 백성들이 그들의 공덕을 생각해서 사당을 세우고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당 제도는 〖신주를〗 한 줄로 남쪽을 향해 배열하였는데, 김 태사의 신주를 동쪽에, 그 다음이 권 태사, 그 다음에 장 태사의 신주를 놓았습니다. 당시 동쪽을 상석(上席)으로 삼았으면 김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되고 서쪽을 상석으로 삼았으면 장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史官)의 기록이나 여러 책들의 기록에 의하면 장 태사의 명위(名位)가 제일 아래에 있는 만큼, 서쪽에 놓았다고 해서 미루어 상석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니 김 태사를 마땅히 제일 높은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애당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그 증수기(增修記)를 지어 말하기를, ‘안동부에서는 고려 왕조의 공신 3명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김공 선평, 권공 행, 장공 길이다.’라고 하여 그 명위의 차례를 순전히 역사 기록만을 따르고 믿었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

'왜적이 된 조선인들'_사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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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된 조선인들'_사료집 ​"가는 곳마다 통행 증서를 조선인들에게 배포해 민심을 잡고있습니다. 조선의 영주들은 백성들을 학대해왔으므로 그들에게 인정과 관대함을 베풀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탄금대 전투 직전 히데요시에게 보낸 편지 ​ 상이 하문하기를,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4일 계해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삼가 생각하건대, 어가(御駕)가 궁궐을 떠나던 날 신은 순릉 향사(順陵香使)로서 대궐문까지 달려갔다가 우연히 본 일입니다. 모여 있던 장수들의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016) 라고 하였고, 싸우러 가던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017)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4일 계유 3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상이 이르기를, "시장 백성들이 다 적에게 부역한다는데……."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어찌 색다른 무리들과 더불어 상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잠상인(潛商人)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아무리 멀리 가신다고 해도 적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서 방비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두수로 하여금 편의대로 종사(從事)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8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사법-탄핵(彈劾)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3일 임술 1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12일 을미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왜적이 버리고 간 포로들을...

정도전이 난을 일으키려하자 이성계가 이방원을 시켜 주살하게하다.

정도전이 난을 일으키려하자 이성계가 이방원을 시켜 주살하게하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의 건국(建國)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戶)를 내려 주고, 그 후에 여러 왕자들과 공신(功臣)으로써 각도(各道)의 절제사(節制使)로 삼아 시위(侍衛)하는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加別赤)를 방번에게 사양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서자(庶子)를 꼭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심효생은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여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만들게 하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芳蕃)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謀議)하여 자기편 당(黨)을 많이 만들고는, 장차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황자(皇子)들을 왕으로 봉한 예(例)에 의거하여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도전 등이 또 산기 상시(散...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고려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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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기록 고콘초몬주의 충격적 기록.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고려를 정벌하다 정도전의 군제 개혁 상소에서 뜻하지않게 나타난 역사의 비밀...,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

정도전의 군제 개혁 상소에서 뜻하지않게 나타난 역사의 비밀.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고려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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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028) 의 환시(宦侍)·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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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028) 의 환시(宦侍)·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